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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2017년 6월15일 지역스토리의 힘 1) 옛 삼성의원터 표지석 제막식(2017.06.15. 등록)
  • 도시재생
  • 2017.11.21 15:03
  • 631

    창원삼성의원 마산최초 조선인 병원 金선집

      

    2천석 家産 기울여 인술의 家計터전 닦고

      

    인술의 가계세운 동성동 248번지

      

    동성동 248번지의 단층양옥, 늦봄의 따스한 햇볕이 풍모 있는 정원에 한 송이 목련을 피우고 있다.

      

    이집이 뒷날 의학박사 17명을 냈으며 민족의 불운 속에서 혹은 병마의 질곡에서 이웃과 동포를 도운 芝田 김형철 선생의 생가요, 2천석 가산으로 인술의 가계를 세운 김선집 선생이 살던 곳이다.

      

    김선생은 대를 이어 고장을 살아온 마산토박이다.

      

    김령김씨 가문의 자손으로1878년에 태어나 32세에 한일합방의 비운을 맞았다.

      

    시장에서 포목상을 경영하던 선생은 합병 후 1932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한편으로 상해임시정부와 해외독립운동을 도와 자금 주선도 했고 불우한 항일지사들의 자체교육도 맡아오며 ‘알아야 한다’는

      

    진리를 깨우쳐 자녀들의 교육에 생을 바쳤다. 선생의 슬하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장남으로 형수, 차남으로 형철씨 등이 그들이다. 선생은 이들 다섯을 모두 국내 혹은 국외로 유학을 보냈으니 장남은 경성 칙량학원 2남 3남은 일본 [오카야마 의전], 4남과 5남은 명치대학을 보냈고 딸들은 모두 전문대학까지 마치게 했다.

      

    반세기전 아직 개화되지 못했던 마산에서 이 같은 사실은 실로 거목적인 일이었다. 선생은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도 우리가 무식했기 때문이었다.’고 단정하고 알기 위해 배워야하며 배우기를 강요했다. 그래서 허다한 사람들이 자녀을 가졌고, 지사들을 돕는 길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는 교육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실로 먼 앞날을 내다 본 착실한 작업이었다. 선생은 또한 자녀들을 교육시키되 장남은 가계를 잇게 하고 차남과 3남은 의학공부를 시켰다. 정치를 배우면 왜놈에게 아첨하기 쉬우며 사회와 이웃을 위해 일하되 생명을 구하는 가장 귀중한 일에 보답하기를 바랬다. 선생의 이 같은 깊은 뜻은 곧 차남 지전선생과 3남 형달 선생에 이어져 열매를 맺었다. 일본에서 유학공부를 마친 두 형제는 귀국,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마산과 밀양에서 각각 삼성의원을 열어 아버지의 뜻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마산에서 개업한 지전 형철선생은 3.1운동과 10월사건 해방 후의 호열자 창궐 등, 일제의 학대와 무서운 전염병 속에서 동포와 이웃을 구한 향토의 은인이자 숨은 항일지사로 너무나 잘 알려진 분이다.

      

    한국인으로 처음 병원차린 芝田

      

    지전 선생은 1891년에 태어나 공립마산보통학교(성호국민학교)를 졸업(제1회),

      

    일본 오카야마 의전을 거쳐 1918년 10월20일 마산에서 삼성의원을 열었다.

      

    당시 마산에는 일본인 3명이 병원을 내고 있었지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전선생이 자리 잡은 곳은 지금의 대광예식장 안집(그 집은 그대로 있음)이다.

      

    삼성의원이 문을 열자 고향사람들은 모두 이 병원을 찾았다. 일본인들의 더러운 손에 병조차 고치지 않겠다는 민족감정이 앞섰기 때문이고 원장 지천 선생이 영리를 떠나 실비를 받거나 무료로 치료를 해주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 같은 조용한 항일과 이웃을 돕는 깊은 정은 개업 5개월 만에 부닥친 3.1운동의 민족적 절규 속에서 더욱 열을 더했다.

      

    가난한 이웃과 항일투사 돌보고 

      

    3.1의 봉화가 높이 올라 일경에 항거한 청장년들의 사상자가 날로 격증해 갔다.

      

    부상한 사람들이 위급하여 일본인 경영 병원을 찾아가면 의사로서의 사명을 잊고 적대시하고 소홀이 취급하기 일쑤였거나 아니면 아예 치료마저 거부하고 나서는 판이었다. 선생은 팔을 걷고 나섰다. 입원실은 가득차고 내실 지하실까지 비워야 했다. 피를 본 일경의 독기서린 눈이 병원을 휩싸고 피를 흘리는 만세운동의 청년들을 끌고 가는 형편이었다. 선생은 일경의 눈을 피하는 방법으로 내실과 지하실을 낸 것이다. 마산뿐만 아니라 인근 진동 칠원 군북 등지에서도 만세 운동의 부상자는 일경의 눈을 피해 삼성으로 찾아들었다. 입원실이 없어 입원을 못하거나 왜경의 눈이 무서워 병원을 찾지 못하는 환자가 많았다. 선생은 이들을 위해 왕진 가방을 들었다. 왕진조차도 어려울 때가 많았다. 숨어 치료를 받는 만세운동자들을 찾기 위해 왜경은 의사를 뒤따라 미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간호부에 가방을 들려 보낸 후 볼일 보러 가는 척 해가며 환자를 찾기도 하였다. 선생이 만세운동자들을 치료해주는데 열과 성을 다하자 일경은 선생이 미웠다. 그래서 경찰에 연금을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삼성의원의 환자들은 대부분이 무료이거나 실비였다. 3.1만세의 거센 바람이 잠든 후에 선생은 한결같았다. 가난한 이웃과 겨레를 말없이 인술로 도와갔다. 삼성의원은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받는 곳으로 알려졌다. 해방이 되고 일제가 물러간 다음해였다. 이 나라 전역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왔다. 호열자였다. 의사도 귀하고 약도 귀했다. 무수한 생명들이 숨져갔다. 의사가 이더라도 병원이 있더라도 이 무서운 전염병 환자는 냉대를 받았다. 그러나 삼성의원은 달랐다. 지전선생도 달랐다. 병마와 싸움을 맞붙었고 환자를 찾아 왕진가방은 불이났다. 지전선생에게는 일제와 싸우는 것도, 병마와 싸우는 것도 이웃을 위하는 것에는 다를 것이 없었다. 병마가 물러간 후 10년, 그는 건설되는 조국의 한 변두리 남해의 조용한 물결을 지켜보며 병원을 지키다가 1957년 3월 15일 개업한지 38년 4개월 만에 생명을 지키던 칼을 놓고 은퇴하고 65년 2월 11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까지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실천에 옮긴 훌륭한 의사요, 조국광복을 위해 동포를 지킨 말없는 지사였다.

      

    번창한 후예 의사들만 17명

      

    김선집선생의 후예는 번창하다. 장남 형수씨는 외아들 종규씨를 두어 초대 마산체육회장, 국민회 의장을 거쳐 지금은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종규씨는 다시 아들 3형제를 두어 장남 진석씨는 연희대학을 졸업 한일함섬회사에 근무 차남 진원씨는 휴학중 3남 진기씨는 신진자동차화시에 근무하고 있다. 현재 이 집안의 종순은 진석씨로 시내 산호동에 살고있다.

      

    차남인 지전선생에게서는 외아들로 의학박사 성규씨가 있어 현재 일본에서 연구 중이며 사위로는 전 국회의원(함안) 한종근씨와 안윤봉씨가 있다.

      

    3남 형달씨는 두 아들을 두어 장남 효규씨(의박)는 이화여대 교수 찬규씨(의박) 부산서 개업 중이고, 사위 이상근씨(의박)는 밀양서 개업 중이다.

      

    그 외 선집선생의 사위 손서 등이 대부분(도규?)계에 진출하여 지금 이 가문에는 의박박사가 17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경남매일신문. 1968년 4월 21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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